반응형
     우울증의 인지치료 - 8점
     아론 벡 지음, 원호택 외 옮김/학지사

지독한 우울증에 시달렸을때, 이상하게 세상이 우울함으로 가득차 있는 것 처럼 보였다.

 

그래서 내 자신이 치료되는것 보다 주변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 이 책을 구입했다.

 

이 책은 이론적인 부분보다 실전에서 어떻게 환자를 다루고 대처하는가에 대안 지침서 같은 책이다.

 

구체적인 치료기법과 치료 방법등을 서술 하고 있으며, 환자와 치료자의 대화등의 예시까지 잘 설명되어 있다.

 

이책에서는 인지치료를 중점으로 다루고 있는데 내생각에 이것은 프로이트의 그것과는 반대되는 태도를 보이는듯 하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적 치료에는 아동기 기억이나 트라우마, 그에 따른 무의식적인 요인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반해

 

인지치료에서는 현재의 환자만을 생각한다.


 

사실 나는 프로이트의 이론이 매우 재미있고 많은 부분에 휼룡하다는 점에 동의 하지만 실질적으로 환자를 치료하는데 있어선

 

 부족한 부분이 많다고 본다. 그렇다고 이 책이 서술하고 있는 현재의 환자만을 생각하는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환자의 행동에 대해 가설을 세우고 원인을 찾는 것에 어떤 제한을 둔다는게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입장을 조금 바꿔서 환자의 행동에서 원인을 찾는게 아닌 환자의 행동 자체에 의미를 둔다거나 분석함에 있어도 마찬다지이다.])

 

 이 책에서는 우울증 환자가 일반적인 인지를 다른사람과 같이 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인지구조가 잘못되있다고 가정하는것인데 예를 들면 부정적이지 않은 정보가 들어와도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의

 

인지구조를 파악하여 잘못된 부분을 수정해 나가는 식이다.

 

사실 나는 심리학의 비전공자이기 때문에 이 책을 제대로 읽었는지 알수는 없다.

 

하지만 우울한 사람들이나 인지구조가 뒤엉킨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을 어느정도 느낄수는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비전공자들은 이책을 읽는 것을 비추!! 한다. 왜냐하면 이책의 반이상이 이론보다는 실질적인 행동양식이나 예시이기 떄문이다. (단, 많은 부분이 우울증 환자를 대하는 좋은 태도를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에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과의 관계를 잘하고 싶은사람이나 좋은 태도에 대해 느끼고 싶은 사람은 읽는게 도움이 되긴 할 것이다.)

반응형


 과학과 문명이 발달한 요즘 들어 더욱더 인권이란 단어가 부각되고 사람들에게 인식되어 지고 있다. 영화, 소설등의 많은 문화 컨텐츠가 인권이란 문제를 조명하고 있고 인권에 관한 여러 사회문제들도 부각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사람들은 진정한 인권에 대해 망각 할 때가 있다. 사실 인권에 대한 문제는 굉장히 복합적인 요소가 많기 때문에 사회이슈 혹은 여러 책들과 영화를 보면서 고개를 갸우뚱한 적이 많았다. 그만큼 인권은 역동적이고 유동적이다. 또한 역사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으로 분석해야하는 철학적 주제이기도 하다.


인권의 발명 - 10점
린 헌트 지음, 전진성 옮김/돌베개

"인권이란 무엇이라고 단정 짓기 어렵다. 왜냐하면 개념정의 뿐아니라 그 자체가 이성만큼이나 감성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명성의 요구는 궁금적으로 감성에 호소할 수밖에 없으며 개인의 내면을 움직여 확신을 갖게 한다." 린 헌트 <인권의 발명>

 이 처럼 인권은 이성적인것 처럼 보이지만 감성에 의존하고 있고 상황에 따라선 보편성을 상실하기도 하고 선동적일 수도 있다. 이런 점들은 영화 <언씽커블>, <보이A>, <가타카>에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어떤 하나의 요소 '불확실성'에서 느끼는 사람들의 불안이 인권을 침해하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지 않을까?』

 고문이 굉장히 비인간적인 행위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 하지만 특별한 상황에서 우리는 이런 비인간적인 행위를 용납하려 하기도 한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상황에 따라선 어떤 한 사람의 인권을 짓밝을 수도 있다" 라고 말하기도 한다.


 영화 <언씽커블>은 도시 한복판에 폭탄을 설치한 테러리스트에게 자백을 받아내는 이야기 이다. 자백을 받아내려는 사람은 크게 2명이 있는데 한명은 경찰로서 고문이나 비인권적 행위를 용납지 않는 사람이고 다른 한명은 전문적인 고문집행자이다.

 고문 집행자로인해 첫 고문이 집행되는 동안 관객들은 불편한 감정을 느낀다. 우리는 고문이 집행 되는 동안 그것을 목격하는 사람들이 된다. 고문의 처벌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늘상 있는 일이 아닌 추상적인 의식의 영역이고 고문은 폭력의 온상으로서 지각된다. 우리는 폭력을 무서운 범죄라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양심에 가책을 받지 않고 태연하게 그것을 범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도 후반부로 치닫게 됨에 따라 변하게 된다. 여전히 폭탄의 위치를 알려주지 않는 테러리스트로 인해 안전에 대한 불안감은 고조되고 고문에 대해 반대 하면서 인간성을 강조하는 여자경찰은 이기적인 사람으로 비춰지게 된다. 또한 관객은 입을 열지 않는 테러리스트를 절대 악으로 느끼고 입을 열지 않는다면 고문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게 된다. 고문집행자는 위험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희망으로 여겨진다. 특히나 고문집행자가 화장실에 가서 홀로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관객들로 하여금 '그 역시도 괴로워하며 눈물 흘리는 한명의 사람이었구나' 라고 생각하게 한다. 관객들은 고문집행자의 자기 희생정신에 감동을 하고 테러리스트의 인권에 대해서는 망각해 버린다. 이런 인식은 모든 사람이 느끼진 않았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갖게끔 영화는 유도하고 있다. 사람들은 다수의 불확실한 미래를 보호하기 위해선 한사람의 인권은 무참히 짓밝혀도 상관없다는 관용적인 태도를 보인다.

 테러는 미래의 생존(안전)에 대해 상당한 위협을 가하고 사람들을 극도의 불안에 빠지게 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공황상태에 빠지게 한다. 그리고 그들은 고문이라는 큰 무기를 꺼내드는 것을 허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우리는 고문집행자와 살인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며 미래에 그들의 출현을 어떻게 방치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이때 그들이 우리 자신임을 항시 인정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들을 관용할 수도 그들의 인간성을 빼앗을 수도 없다." 린 헌트 <인권의 발명>

 인권은 모든 인간에게 평등해야 한다. 이것은 엄연한 원칙과 기준이며 타협은 용납 되서는 안 된다. 육체적 고문을 행한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 인간의 존엄성을 포기하는 행위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런 행위들은 정당화 될 수도 없다. 어떤 상황에 대한 윤리적 판단은 일반적인 명제로 만들어 정당화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에게 고문을 가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 인간의 존엄을 포기하는 행위이고 어떤 논리로도 이를 정당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감시와 처벌 - 10점
미셸 푸코 지음/나남출판

"아무리 흉악한 살인자의 경우에도 처벌함에 있어서 적어도 하나의 사정만은 존중되어야 한다. 곧 그의 인간성이다.(humanity)" 미셀 푸코, <감시와처벌>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여자경찰은 이렇게 외친다.

"We are fucking human beings"

어떤 상황에 있어서도 그래도 우리는 인간이지 않느냐는 말이다.

 나는 선에 대한 요구치가 높을수록 정의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판단이 어려울수록 기본적인 원리와 원칙을 먼저 고려해야한다. 무엇보다 기본적인 것은 인간은 존엄한 존재라는 것이고 인권의 존중이야 말로 아주 기본적인 삶의 지표라는 것이다.

P.쇼뉴 "생활수준의 일반적인 상승, 부와 재산의 다양화등 이것들이 끼친 영향중에 하나는 안전에 대한 욕구이다." <감시와 처벌>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안전에 대한 욕구가 굉장히 커져 있다. 우리는 안전에 대해 침해 받는 것을 두려워 하고 혹시 모를 안전의 불확실성에 대해 큰 '불안'을 느낀다.


 영화 "보이A" 는 성인이 된 소년범의 사회적응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소년은 어릴 때 실수로 한 소녀를 살해하게 되고 성인이 될 때까지 교도소에서 지내다가 복역을 마치고 '잭'이란 새로운 이름으로 오래도록 단절되었던 진짜 세상에 뛰어들 준비를 한다. 그의 착한 본성을 알고 있던 보호감찰사 테리의 도움으로 새 직장과 친구, 애인까지 생기게 되었지만 그의 석방 소식이 TV에 보도 되면서 과거가 드러나게 된다. 잔혹한 과거 앞에 다정했던 사람들은 차갑게 돌변하게 되고 소년은 결국 자살을 선택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안전에 대해 불확실한 요소는 곁에 두려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과거의 오류를 통해 미래를 유추하려 하고 이를 통해 불안을 느낀다. 더 나아가선 과거의 범죄 사실이나 잘못을 바탕으로 사람들은 그 사람의 정념, 본능, 비정상, 불구, 부적응 등을 심판한다.

 이런 부분은 경험적으로 상당부분 일치하기 때문에 굉장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하지만 이것은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지 사실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안전에 대한 욕구 때문에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없는 범죄자의 정신을 심판하는 일을 행한다. 인터넷이 발달한 현대에서는 사진이 공개되고 신상이 까발려지는 것이 순식간에 일어나기도 한다.


사회적 편견은 굉장히 무서운 것이다. 이런 편견은 그 사람의 자유를 빼앗고 인권을 빼앗는다. 편견 때문에 인권의 상당한 부분이며 만인에게 동일한 가치를 갖는 자유를 빼앗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적어도 결말에서 볼 수 있듯이 영화 <보이A에>서는 "아니요"라고 대답하는 듯 하다.

그리고 <인권의 발명> <감시와 처벌> 에서는 더 강하게 "아니요"라고 말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도 이런 자유를 빼앗고 범죄자의 신상을 공개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공개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인권의 발명 ; 린 헌트(Lynn Hunt)

감시와 처벌 ; 미셀 푸코(Michel Foucault)


반응형

역사 에세이

장수한 지음
동녘 1992.03.01
평점


느낀점일 뿐

------------------------------------------------------------------------------------------

우리의 지식들과 세계관의 출발은 어디서, 언제 부터 출발되는것일까.

 

우리는 너무 어려서부터 여러가지를 배운다. 그리고 우리는 학교에서 가르키는것이 모든것이 사실이라는 생각을 하게되고 그것에 대해 의심해볼 생각조차 하지않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도 한번쯤 의심할 필요가 있다. 우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에대해서는 더 생각해봐야 할것이다.

 

 우리가 배워온것은 그때의 사회적인 환경과 결부된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때의 사회 환경과 분위기. 정책. 역사가 포함된것에 대해 배우며. 그것은 강압적이진 않지만 반강제적인 주입식 교육이며 우리는 그 교육에 의해 의심해볼 생각조차 망각한다.

 

 물론 나도 내가 받았던 교육이 사실과 크게 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받았던 교육이  항상 진실일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물론 1+1=2와 같은 규칙이나 기하학에 대해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부정'이라해도  우리는 그속에서 배웠던 것에 대해 '부정'하지 않는다.

 

 정책적인 측면과 역사적인 측면에 관해서는 우리는 일관되게 주입되어 다른방향으로 나아가기는 쉽지않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부터 언어교육을 받으며 태어난다.

 

  bomb, born, burn, bone 와 같은 각기 다른 발음도 우리말로는 구분해 적지 못하면서(한가지로 적으면서) 우리말로 모든발음을 다 표기할수 있다 라는 거만한 사고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실제로 우리는 우리의 언어외의 발음에 대해 사고하기가 무척이나 어렵다. 실제로 우리는 <으 + 이 = 의> 라는 발음은 생각할수 있으나 <어 + 으>의 발음은 우리의 사고로 생각하기가 무척이나 어렵다. 하지만 이런 발음을 쓰고있는 나라에서는 아닐 것이다 [옛날 어딘가에서 가지고옴]

 

이런글을 쓰는 나또한 여러가지 다양한 곳에서 영향을 받았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부터 어떠한 사고의 벽에 갖쳐 살아오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벽을 깨지 않고 사는것이 더 도움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경계는 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가장 중요한것은 '본질'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믿음' 이 아닐까


반응형

독일의 철학은 음악이나 문학 등과 함께 독일인이 세계문화에 기여한 것 중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일반적으로 독일인은 너무 이론적이라는 평이 있으나 사색하는 것과 철학하는 것은 독일인에게 오랜 역사적 전통을 근거로 한 국민성의 중요한 구성요소가 되었다. 독일 철학의 역사는 바로 독일인이 그때 처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생활태도를 깊이 반성하고, 또 인간을 에워싼 갖가지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을 줄곧 찾아온 노력의 발자취이다. 그것은 또 그와 반대로 그 사람이 놓인 역사적 상황을 가장 깊은 차원에서 파악하고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사색의 철저성과 또 이 철저성을 갖추어야 했던 상황의 특수성이 독일철학을 유럽뿐 아니라 다른 지역의 철학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개성과 중요성을 띤 것으로 만들었다<네이버 백과사전>

 유럽의 발전, 더나아가선 세계의 발전은 유럽의 철학이 없었다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들의 발전된 세계의 원동력이었던 수학이나 과학 또한 철학에서 나온 것이지 않은가. 그들의 역사는 언제나 철학과 함께 살아 숨 쉬었고 그들의 사고를 지배했다. 때문에 그들을 깊게 이해하기 위해선 그들의 철학을 이해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독일은 전쟁으로 인한 황폐화를 경험하고 북방의 험한 풍토에서 살아와서 그런지 그들의 철학은 깊고도 철저한 느낌이다. 또한 사색적인 느낌이 아주 강하게 느껴진다. 다른 유럽의 나라와는 다른 특색이다.

 칸트 - 근대 철학의 재건


칸트는 독일 철학을 세계 철학의 정상에 올려 놓은 관념론의 대표적 인물이다. 칸트는 이성주의 철학을 했다. 즉 이성이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타고난 능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한마디로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고 질문한다.
<순수이성 비판>이라는 책은 "인간은 무엇을 알 수 있는가"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는 인간의 행동, 도덕 등의 문제인데 이것을 다루고 있는것은 <실천이성 비판>이다. <판단력 비판>은 "인간이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를 다루고 있다.
 이처럼 칸트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세 가지 활동에 대한 질문을 던짐으로서 주체로서 인간과 진리를 확고하게 구축하려 했었던 것 같다. 


 이전의 철학들이 주체에 대한 물음들로 가득했기 때문에 칸트는 주체가 출발점이 될 자격이 있는지 검증해야 했다. 
 흄은 귀납론을 부정했다. 우리가 흔히 쉽게 드는 예는 "이제까지 본 모든 까마귀가 다 까맸다. 따라서 모든 까마귀는 까맣다" 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말이 보장될수 없다는 것을 안다. 이것은 경험적 지식은 어떤 확실한 지식을 줄 수 없다는 말이다. 칸트는 이것을 받아들였고 또한 사물 자체를 인식하는 게 불가능 하다고 말했다. 근데 진리를 사물 자체와 일치하는 지식이라고 한다면 진리는 불가능 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때문에 칸트는 '진리'를 다른 식으로 정의하려 한다. 어차피 알 수 없는게 사물 자체라면 아무리 날고 뗘도 사물에 대한 지식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본래는 어떤지 모르지만 우리가 보는 모습과 '본래'가 일치하느냐를 두고 고민하지 말고 사물을 보는 모습을 판단하게 하는 방식을 연구하자고 제안한다. 이는 정말 놀라운 발상이 아니지 않을 수 없다. 중세 때 신의 존재를 떨치기 힘들었던 것 만큼 근대의 주체와 진리의 개념을 재건하려는 이 시도는 정말 혁신적이라 생각된다. 이는 대상이 인식을 만드는게 아니라 인식이 대상을 만든다는 생각이다. 이 처럼 우리 인간의 판단 형식을 찾으려는 시도는 이전의 생각과는 크게 다르다. 
 칸트 철학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선험적 종합판단'이란 말이 있다. 선험적은 경험적이란 말과 대칭된다. 

 우리의 인식 능력의 구조는 우리에게 선소여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적 지각을 통해서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경험 대상의 속성 속에 이러한 구조를 반영함으로써만 잡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경험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러나.....(생략).....우리가 어떤 것이 일반적으로 타당하다거나 지금까지 있어 왔던 그대로 있어야 한다는 말을 정당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우리의 인식이 경험으로부터 유래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한편 보편적이고 필연적으로 참이지만 실제나 실재의 구조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는 인식들이 있다. .......(생략)......보편성과 필연성이라는 특징만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못하다. "모든 인간은 결혼했더나 결혼하지 않았다", "모든 삼격형은 세 각을 가지고 있다", "검은 말은 흰 말일 수 없다" 와 같은 명제들은 보편 타당하고 필연적으로 참인 명제이다. ......(생략)......이것은 우리가 실재를 기술하는데 있어서 언어적 표현을 적용하는 방식이나 방법에는 일종의 척도가 되는 것이다.<근대독일철학, 요세프 슈페크>

 후험적(경험적)은 인간이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이다. 반면 선험적인것은 인간이 경험하지 않아도 아는 것이다. 보통 종합판단이라 하면 후천적이다. 어떤 사물이나 대상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면 경험이 있어야 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칸트는 물은 것이다. "선험적 종합판단은 가능한가?". 위 문단에 있는 "삼각형은 세 각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은 선험적이긴 하지만 동어반복이다. 주어에 이미 세 각을 갖고 있다는 의미를 포함한 것이다.(이는 새로울게 없다) 하지만 "모든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이다" 것은 주어에 내각이 180도 라는 분석을 할 수가 없다. 즉 이 명제는 주어에 없는 삼각형의 성질에 대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것이 선험적 종합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이야기지만 재미있어서 적어보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것도 동어 반복인 단순한 언어식 장난이라고 해석할수 있다.)
 이와 같은 선험적 종합 판단을 인간이 진리에 도달하게 해주는 판단형식이라 칸트는 생각한 것이다.

칼 맑스 (Karl Heinrich Marx)
 사실 맑스와 프로이트는 철학자로 유명하다기 보다 경제학자와 심리학자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은(방법론적인) 이전과는 틀린 혁신적인 생각들이었기 때문에 철학자라 불려도 될 것이다.(물론 그들은 철학적인 저서들도 있다.) 맑스에 대한 평가는 상반되는게 많지만 한번쯤은 그의 저서나 그에 관한 책을 읽는 것이 좋다고 생각된다. 
 맑스는 여러 철학자와 마찬가지로 인간을 정의 했다. 그는 인간의 특성에 대해 정의 내리려 하지 않았고 사회적인 특징을 찾으려 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고 말했다. 이는 사회적 관게에서 동 떨어져 인간을 정의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하고 하찮은 나의 생각인데 예전에는 대학친구들과 고등학교친구들 혹은 직장생활에서와 친구들 사이에서의 나의 모습들이 틀린것을  '자아 죽이기', '자기희생' 쪽으로 생각 했었을때도 있었지만 확실히 사회적 관계의 총체쪽으로 보는것이 설득력이 높은것 같다.좀더 작은 관점에서 보자면 자아는 내가 결정하는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관계(환경)가 결정하는 것이라는 건데..... 인간이란 어쩔수 없는 사회적인 동물인가보다. 흠.....그래도 내가 집착하는 몇안되는 개념 중 '자기희생' 이라는 것도 떨칠수는 없긴 하다.)

이런 생각들 또한 근대철학에서 끊임 없이 사고 했던 '주체'에 대한 생각들을 뒤집는 생각이라 볼 수 있다. 이런 혁신적인 사고가 그를 위인으로 만든 것이라 생각된다. 이런 생각은 주체철학과의 결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사고로 그는 역사 개념 또한 변화시킨다. 역사 역시 사회적 관계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다. <자본>과 같은 저작은 자본축적의 역사적 경향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프로이트 - 정식분석학과 철학




 많은 사람이 알다시피 프로이트는 철학자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철학에 대해 엄청난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철학 뿐 아니라 수없이 많은 분야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무의식'이란 아주 유명한 개념 때문이다. 이 개념은 철학에 아주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물론 '무의식'이란 개념외에도 정신분석학이란 독자적인 학문을 만들어낸 체계적인 개념들과 강력한 이론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는 의사였다. 최면을 행하던 중 그는 정신안에 있지만 의식되지 않는 영역인 '무의식'이란 것을 생각하게 된다. 또한 무의식을 발견함에 그치지 않고 보편적인 것으로 생각해 연구를 한다. 그리하여 <꿈의 해석> 이란 대작을 책을 집필한다. 
 그는 무의식이 특히 성욕과 관련있다 생각하였고 도덕적으로 용납하기 힘든 욕망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억압되고 감추어 진다고 했다. 유명한 예가 바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이다. 한마디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섹스하고 싶다는 끔찍한, 통제받을 만한 욕망이다.
 무의식의 발견은 정신분석학 최대의 업적이고 정신분석학이 존재하는 근거이다. 이런 무의식은 근대적 철학의 기초를(주체철학)을 해체한다. 하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어떻게 논리적으로 표현하기는 힘들다. 두루뭉수리하게 이야기 하자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에서 생각하는 '의식의 나'와 '무의식의 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는 '나' 이외의 다른 '나'가 인간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저서들은 참신하기도 하지만 다양한 임상적 사례와 문헌적인 분석들이 많기 때문에 재미가 있다. 하지만 성(性)이 많이 개입된 그의 이론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그의 이론은 이해하냐 못하냐 보다 받아 들이느냐 못받아 들이느냐에 관한 문제가 더 클 것이라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된다. 

비트겐슈타인 - 언어 게임


 
 비트겐 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는 내가 읽은 책 중에 가장 어려운 힘든 책 중에 하나였다. 책의 형식 또한 누굴 이해시키려고 쓴 설명 형태가 아닌 번호를 매긴 문장의 나열이었다. 작가 또한 스스로 비슷한 사고들을 해본 사람만이 이해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논리-철학 논고는 철학적 문제들이 언어 논리에 대한 오해에 기인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유명한 명제들인 다음의 말로 요약 될 수 있을 것이다 :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해질 수 있다. 그리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들은 침묵해야 한다. 

1. 세계는 일어나는 모든 것이다.
2. 일어나는 것, 즉 사실은 사태들의 존립이다.
3. 사실들의 논리적 그림이 사고이다.
4. 사고는 뜻이 있는 명제이다.
5. 명제는 요소 명제들의 진리 함수이다. (요소 명제는 자기 자신의 진리 함수이다.)
6. 진리 함수의 일반적 형식은 [ P,E,N(E)] 이다
   이것이 명제의 일반적 형식이다.
7. 말할 수 없는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논리-철학 논고에서 그림이론이라 불리는 그의 이론은 명제들은 요소 명제로 나뉘고 이 요소명제는 참인지 거짓인지를 검증할 수 있다고 한다. 명제의 진실과 거짓은 요소명제들의 진리함수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수학에서 배웠던 진리표를 이용해 명제의 진실, 거짓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개별적 명제들과 연결사를 통한 진리여부에 관한것은 그전에도 있었지만 비트겐슈타인은 다른 견해를 보인 듯 하다. (명제 자체에서 해석 하려하는)

5.132 p가 q로부터 따라 나온다면, 나는 q에서 p를 추론할 수 있다 ; p를 q에서 연역할 수 있다. 
 그 연역의 방식은 오로지 그 두 명제로부터 끌어낼수 있다.
 그것들 자체만이 그 추론을 정당화할 수 있다.
 추론들을 정당화한다고 하는-프레게와 러셀에서와 같은-"추론 법칙들"은 뜻이 없으며, 쓸데없을 것이다. 

 하나의 원자적 명제로부터는 아무것도 연역될 수 없다는 사실은 예컨대 인과성에 대해 흥미롭게 적용된다.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에서는 인과관계와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에서는 인과 관계와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는 "우리는 미래의 사건들을 현재의 사건들로부터 추론할 수 없다. 인과관계에 대한 믿음은 미신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내일 태양이 떠오르리라는 것은 하나의 가설이다. 우리는 사실 그것이 떠오를지 여부를 알고 있지 못하다. <러셀의 논리-철학 논고 서론 중>

 후기에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을 비판하며 다른 입장을 펼친다. 수학적 혹은 과학적인것과는 좀 더 떨어진 새로운 철학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그는 언어의 규칙을 모르더라도 실천을 통해서 얼마든지 배우고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단어의 사용은 행위 위에서, 단어의 사용은 "삶의 형식"에서 소급되는 것이다.
 후기의 그의 언어게임이란 이론은 언어와 실천의 결합이라고 볼 수 있다.

 나로서는 비트겐슈타인의 책은 너무 어려워 이해하기가 너무 힘들다. 이런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느낀점을 쓰자면 서로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는 그의 전기, 후기 저작들에 대해 이해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기에서 마무리 될 것이라 생각했던 그의 저작이 왜 <철학적 탐구>로 이어졌는가 왜 전기사상에서 한계를 느꼈는가를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 생각된다.
 
 17세기 전반에 일어난 30년전쟁으로 국토 전체가 크게 황폐된 독일은 근대화 물결에서 다른 유럽 여러 나라보다 낙후되었다. 이 사실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독일문화 전반의 모습을 규정하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한편으로는 중세 이래의 봉건적인 생활양식과 사회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민감하게 선진국인 영국과 프랑스의 새로운 문화에서 영향을 받는다는 ‘비동시적(非同時的)인 것의 공존’이라는 독일문화의 일반적 특징은 철학에서도 분명히 인정된다. 오히려 그와 같은 일반적 특징이 가장 전형적으로 나타난 부문이 바로 철학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비동시적인 것 사이를 상상력을 비약시켜 건너지르는 데 사상(思想)이라든가 철학 본연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 비동시적인 것 사이를 팽팽히 당기는 긴장의 강도가 자연히 독일 철학을 일반적으로 특징짓는 관념적 ·이상주의적 ·사변적 ·낭만적 ·내면적이라는 일련의 성질을 낳은 원인이 되었다. <네이버 백과사전>

 그들의 사상이 관념적이고 이상주의적인 이유는 위와 같다고 백과 사전은 말하고 있다. 이런 환경은 독일인의 철학 뿐만 아니라 그들의 국민성까지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또 다시 한번 그들의 관념적이고 이상주의적인 철학은 다시 한번 그들의 사고와 국민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참고서적>

철학과 굴뚝청소부 - 10점
이진경 지음/그린비

논리 - 철학 논고 - 10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지음, 이영철 옮김/책세상

근대독일철학 - 8점
요세프 슈페크 엮음, 원승룡 옮김/서광사

(철학과 굴뚝 청소부는 쉽게 쓰여진 철학서 중 으뜸이라고 생각된다.) 

그 외 예전에 읽은 책들

반응형
국제열차 살인사건 1 국제열차 살인사건 1
김성종 | 추리문학사 | 19870901
평점
상세내용보기
| 리뷰 더 보기 | 관련 테마보기


총 3권으로 구성된 추리 소설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추리소설로 시작해서 액션 스릴러로 끝나는 느낌이다.

문체는 간결하기 때문에 쉽고 빠르게 읽혀지는 느낌이다. 때문에 자기전에 조금씩 봤는데 어느새 3권을 다 봐버렸다. 

소설은 주인공의 현재와 과거를 오가고 등장 인물들의  이야기까지 전해주는 등의 강약조절을 통해 지루하지 않게 해준다. 중간 중간에 야한 장면들도 많아서 몰입감을 더해준다. ㅋㅋㅋ

내용은 작은 일이 거대한 사건의 소용돌이의 시발점이 된다는 흥미로운 내용이다. (아버지의 사라 또한 느낄수 있다.)

확실히 재미있는 소설이긴 하지만 옛날 소설이라 그런지 투박한 설정이나 설득력이 조금 떨어지는 설정&구성도 있었다. 특히 마지막 결말은 맘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결말이 중요한 소설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재미있었고 특히 1권에서의 긴장감과 빠른 전개는 상당히 재미있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게 하는 마력이 있었던 것 같다. (잠자기전에 조금 본다는게 새벽까지 끝까지 다봤었다.)


이글은 "인터파크도서"에서 작성되었습니다.
반응형

모질게 토익 듣기만 해도 느는 토익 LC

 8점


홍원표 지음/21세기북스(북이십일)



문제를 푸는 문제집이 아니라 파트별로 자주 기출되는 표현들을 정리해논 책 정도라고 보면되겠다. 책에는 cd 2장이 같이 제공되는데 한장은 미국발음이고 한장은 영국 발음이다.

씨디는 의미파악 훈련용 (영문+한국인해석) 버전과 듣기집중 훈련용(영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책이 작기 때문에 들고 다니기에는 편하다.

이 책의 목표는 매일 반복적인 언어 학습을 통해 귀를 열도록 하는것에 있다. 그 모토대로 짬짬이 시간날때 듣기에는 좋은 구성이라 생각된다.

 part1 은 '주제별 문장 듣기'와 '구문별 문장 듣기'가 있는데 길지도 않고 가볍게 듣고 넘어가기에 좋다.

 part2 는 '유형별 질문 듣기'와 '고난이도 대답 듣기'로 구성되어 있다. 유형별 질문듣기는 질문의 형태별로 나눠서 질문만 계속 들으며 학습하는 것이고 고난이도 대답 듣기는 까다로운 대답을 정리해서 듣기 훈련을 하는 것이다.

part3 는 '주제별 대화듣기'와 '구조별 문장 듣기'' 고난이도 문장듣기'로 구성되어 있다. ↓ 이렇게 되어있다.

part 4는 '주제별 지문 듣기'와 '직청직해' 로 구성되어 있다.


아직 끝까지 듣지는 못했는데 part 2를 반복해서 청취한 결과 part2가 더 잘들리는 느낌이다. ㅋㅋ
나같이 귀찮니즘이 있는 사람에게는 틈틈이 들을수 있는 좋은책인 것 같다. 




파트2까지만 듣고 토익 시험을 봤는데 확실히 파트2가 점수가 올랐다. 나같이 귀차니즘이 있는 사람에겐 좋은 책인듯 싶다.

반응형


 
몽타이유 - 10점
엠마뉘엘 르루아 라뒤리 지음, 유희수 옮김/길
 
 


 중세말 남프랑스 어느 마을 사람들의 삶...... 처음페이지를 펴는 순간 써있는 표어와 몽롱한듯한 제목인 몽타이유. 전체적으로는 재미있는 책임에도 처음엔 이 책이 그다지 재미가 없었다. 서사적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챕터별로 주제를 정하고 주제에 맞는 사실의 열거라는 느낌이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만큼 이 책은 한마을의 종교, 민속, 결혼, 집, 성생활등 방대하고 다양한 종류를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이런 서술 방식이 처음엔 지루 할 수도 있겠지만 읽어나갈수록 몽타이유라는 마을이 머릿속에서 선명해지고 구체화 되어 흡입력있게 이해되는게 이 책의 매력이 아닌가 싶다.

 

 이 책이 더욱더 특별한건 많이 다뤄지지 않는 농촌사회를 다루고 있다는 것과 지리적 위치의 특수성인 듯 싶다. 우리가 배워왔던 건 도시중심의 역사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의 내용은 우리가 알던 중세와 많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몽타이유라는 마을의 위치가 특수하다고 하여 모든 결과를 특별하게만 보는 것도 선입견이라는 생각이 든다. 몽타이유는 지리적 특수성 때문에 외부와의 접촉이 비교적 적었고 결혼까지 마을사람끼리 하는 것이 대부분 이었다. 이런 환경은 그 마을 사람들이 이단으로 빠질 수 있는 아주 좋은 환경이다. 또한 반대로 이런 환경은 카타르파의 성격을 여실히 드러내기에 좋은 환경일 수 있다. 그들의 앞 길에 장애물이 많이 없기 때문이다.

 

이곳의 카타르파의 모습은 내가 알고 있던 바와 많이 달랐다. 너무나도 순수한 카타르파라 생각했지만 나에게는 그다지 순수해 보이지는 않았다. 또한 그곳의 카톨릭도 마찬가지였다. 그곳의 종교는 적어도 휼룡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내가 생각했던 중세관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이러한 물음들은 게속 나를 따라다녔다. 과연 이 물음이 몽타이유의 특수성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보편적이진 않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는지에 대해 아직도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물론 몽타이유가 프랑스를 대표할만한 마을은 아닐 것 이다. 하지만 이것은 대중적인(혹은 민속적인) 성향이 강한 가톨릭 혹은 이단의 존재 가능성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점은 중세를 한쪽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풍성하고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푸르니에 주교와 작가에 대한 존경심도 들었고 이 책에 대한 부러움도 들었다. 우리나라의 역사는 이런 종류의 책이 거의 없는 듯 하다. 식민지적 사관과 민족주의적 사관이 난무하는 우리나라의 역사에도 몽타이유처럼 농촌의 한 마을을 자세히 표현한 역사서나 자료가 있으면 더욱더 풍성한 역사가 될듯 싶다. 「고구려의 한 농촌마을의 이야기」 생각만 해도 멋지고 재미있을 것 같다.


반응형
참신한 상상력이 가득한 김영하의 단편집.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 10점
 김영하 지음/문학동네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 7 
사진관 살인사건 / 35 
흡혈귀 / 75 
피뢰침 / 107 
비상구 / 137 
고압선 / 179 
당신의 나무 / 209 
바람이 분다/ 237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 265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바람은 분다. 바람이 분다. 다섯 번을 되뇌고 하늘을 본다.컴퓨터를 켠다. 컴퓨터를 끈다. 컴퓨터를 켠다. 컴퓨터를 끈다.시간이 흐른다. 시간은 흐른다. 시간이 흐른다. 시간은 흐른다. 한 여자를 잊지 못하고 있다.게임을 한다. 게임이 한다. 게임을 한다. 게임과 한다. 게임을 한다.시간이 가지 않는다. 시간이 가지 않는다. 시간은 가지 않는다.불을 끈다. 이제 그녀의 얼굴이 보인다.

 

-김영하의 소설 바람이 분다 중에서-

 

 사실 소설을 영화로 옮기는 것은 쉽지 않다. 많은 소설을 영화화 한 작품들은 “얼마나 원작에 충실하게 했는가?“ 라는 질문에 직면해왔다. 장편소설을 영화와 한 작품들은 사실 많은 부분을 제거하거나 변형을 가해 만드는 것이 대다수이다. (죠제는 제외 단편소설같다가 졸라 잘만듬 하하) 그러다 보면 앞뒤의 상관관계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지 않을 때도 있다. 바람이 분다는 단편소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바람이 분다” 에서는 살을 붙이지는 못할망정 중요한 살들을 제거하는 오류를 범하고 만다. 그래서 영화속에선 조금은 어색한 것처럼 보이는 장면이 등장하고 각 캐릭터의 섬세한 심리 상황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 1인칭인 소설을 영화로 옮기는 것 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대화체 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서술한 것이 더 많기 때문이다. 때문에 모든 생각을 영상과 소리로 표현하기는 매우 까다로울 것 이다. 물론 나레이션이 많이 들어가기는 하지만 너무 많은 나레이션을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영화에서는 많은 부분을 배제 한다.

 

사실 영화를 본지 오래 되서 그런 건지 머리가 나쁜 건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 특히 이 영화는 나레이션이 많아서 그런지 구체적인 나레이션이 생각나질 않는다. 그래서 인지 비교를 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 이런 내 머리가 안타까울 뿐이다. 본론으로 넘어가면 영화에선 소설에서의 제 1장부터 많은 부분을 보여주지 않았다.

 

1장에선 주인공의 전체적인 성향과 소설의 전체적인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다. 꿈도 없고 꿈을 위해 뭔가를 할 의지조차 잃어버린 주인공은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슬쩍 비켜서 있다. 세상을 방관하며 살던 그에게 한 여자가 다가와 부딫쳐 버렸다. 그녀는 그가 오래전에 잊어버렸던 누군가에게 감정을 표출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그에게 없었던 목표를 갖게 해주었다. 또 사람에 대한 감정과 행복감을 가르쳐 주었다. 이러한 주인공의 미묘한 감정들을 영화는 많이 표현해 내지 못했다. 또한 주인공의 과거의 대한 회상이나 감상적인 생각들의 많은 부분을 잘라내 버렸다. 이것은 소설에서 중요한 요소 이지만 영화는 그것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단지 빠른 스토리 진행을 할뿐이다. 그러다 보니 캐릭터간의 상관관계가 어정쩡하게 되어버렸고 진행의 유연성 마져도 떨어뜨렸다. 그 결과 마지막장에 있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이해하고 그렇게 되려 하는 주인공의 심정을 이해하기 힘들게 된다.

 

 영화는 소설 보다 표현에 있어서 제한이 따른다. 소설의 다양한 서술체를 영화는 모두 옮겨 내지 못한다. 영화 “바람이 분다“라는 작품도 소설의 독특한 색체를 지닌 문장을 영화로 표현해 내지 못했다. 특히 에필로그에 나오는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바람은 분다. 바람이 분다. 다섯 번을 되뇌고......(생략)이제 그녀의 얼굴이 보인다” 이런 독특한 문체는 영상으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또한 마지막장에 나오는 “사방이 꽉 막힌 이 지하실로 어디에서 이렇게도 바람이 불러오는 걸까. (생략)바람이 분다. 분다” 라는 표현은 영상으로는 느끼기 힘든 소설만의 감각적인 느낌이다. 또한 그렇게 느껴지는 이유가 영화가 이러한 감각적인 표현들을 영화는 잘 표현해지 못했다는 것이다. 물론 카메라를 이용해 바람이 부는 것을 표현하려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영화 “바람이 분다” 는 소설 “바람이 분다” 라는 작품은 다소 소설의 중요한 요소를 놓쳤다. 또한 소설만의 촉감을 살려내지 못하였다. 그로인해 영화는 구멍이 뻥 뚫린 것 같은 느낌이 되어버렸다. 한마디로 전체적으로 각색에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추가로 배우들의 캐스팅도 적절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반응형

예전에 책읽으면서 노트에 써놨던 제대로 정리 안 된 글들의 나열입니다.

--------------------------------------------------------------------------------------------------------

 

두문화 -- 인문학, 자연과학 --분리된 지식구조

 

 

                    불확실성에 관한 진단기술의 발달

과학주의에 대해 --------------------> 불확실성을 안고 살아가는것 ------사회체계(인간또한) 본질적으로 불확실한 영역 

 

       ↑ 과학적 확실성의 의존

 

확실성의 호소----과거의 경우 종교적인 안정 (확실성에 대한 안정 but 원천의 고갈)

 

▶ 불확실성에 대한 대응

자기성찰적 지식활동----선택적지식의대한 성찰(불확실에서 선택을 피할 수 없다)---> 분과의 경계를 허문다

 

 

불확실성의 방법론적 로드맵 자체가 불확실성으로 가득참. 타당한 해석을 하는 것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확실하게!! 평가할수 있는 해석자가 존재하는가라는 문제점

과학 : 복잡성의 연구 -> 단순화

 

만약 주기적 또는 비주기적 현상에 대해 다음의 주기의 사람들의 불안 ---> 수식화 단순화로 안심.

 

인문학은 이론적인 완벽함의 공식화의 우아함보다 예술에서의 우아함에 관심

그러나 좋음의 가치가 보편적인 지식활동 외적인 (바깥의) 기준으로 측정 가능한 것인지

오늘의 Text 와 내일의 Text는 다르다 (인문학적 가정)

 

자연---과학 인간의 태도

과학과 지배욕사이의 불가분의 연계에 관한 생각. (강이 인간에게 봉사하게끔 되어있다는 자세, 강---수력발전)

 

" 우리는 더 이상 인간을 환멸적인 세계의 이방인으로 전락시키는 과학과 반 과학적이고 비 합리적인 항의들 사이에서 합리성에 한계점을 환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고전과학이 우리가 살고 있는 근본적인 양상들을 다루는데 무능력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오늘날 과학은 양적인 세계를 넘어 질적인 따라서 생성의 세계로 나아가기 시작하였다 or 그래야 한다.

 

"자연의 복잡성은 오직 피상적일 뿐이며 각각의 말(체스비유)은 간단한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이 문제점은 논란이 많겠지만 일반적인 성질을 지닌 몇마디만 하면 과학의 발전이 어떤 사람에게는 이성의 승리라고 느껴지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연이 로봇과 같이 어리석다는 것을 고통스럽게 발견하는 환멸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동등하다고 여겨 우리 자신과 비교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질투하는 사람도 늘어난다.

"질투심을 일으키는 것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 사이의 커다란 불균형이 아니라 오히려 근접상태다" - 데이비드 흄 <<인성론>>-

 

→ 진단기술과 (혹은 정상,비정상) 평등도 연결시킬 수 있는 것인가??

-역사적 관점

과거 : 불평등 -> 당연하거나 고칠 수 없는것

현 : 평등 (출생에따른 특권의 폐지) (직업선택의 자유)

미래 (진단기술) : 불평등의 내포 (태어나는 시점에 대해 동등하다 느껴지지만 그러하지 않은)

 

 

삶과 죽음의 경계, 정상 비정상의 경계 ---------> 불확실성 -------> 대응

무엇이 더 나은 인간이게 하는가?

어떤 사람이 더 좋은 사람인가?

확실성이라는 것은 존재하는가?

무엇이 더 인간적이게 하는가?

(구체적인 방법론적인 예시를 들자면) 20대의 자살은 (사망률1위 또는 2위) 그냥 단순한 죽음이 아니다.(개인적인 측면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체계에 기인한 것이고 그것에 관련된 사람들과(사회지배계층) 죽으로 몰아갔던 사람들은 책임을 져야한다. 라는 관점으 어떠한가?

 

 

◆불확실성 --> 불안으로서의 해석

우리의 요구와 세상의 불확시한 조건 사이의 불균형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무작위 집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예술은 "삶의 비평"

소설, 시, 희곡, 회화, 영화등 예술은 재미있게 익살을 부리기도 하고 근엄한 표정을 짓기도 하면 우리에게 우리의 조건을 설명해 주는 매체 역할을한다

->세상을 더 진실하게, 더 현명하게, 더 똑똑하게 이해하는 방법을 안내해준다.

    

                     교정

현실 ---> 예술 ----> 더 나은 삶

 

Input

-----> 진단기술 -----> 결과  -------->  긍정적 측면

                                           ↘

                                               ----->  부정적 측면

 

 

Input

-----> 불확실성  -----> 

                       <------ 불안  -------->  긍정적 측면

                                           ↘

                                               ----->  부정적 측면

 

감정 자체가 불확실성을 내포 우리를 건강과 미덕으로 이끌어주기도 하지만 방종, 분노, 자멸로 몰고갈수도 있다.

이성을 이용하여 적절한 목표로 이끌어 보자.

 

죽음

누구나 언젠가 죽는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 일 수 있다.

 

삶과 죽음의 경계.

 

              삶                                             죽음(삶의 유한성)

 

사회의 가치에 따른 삶                                      모든게 무의미            ------> 해답 : 종교적, ????, ????,?????

야망,권력에 대한 집착

선망 호색, 오만, 복수, 분노 존중

 

조건부 사랑

지위가 유지되는 사랑밖에 얻을 수 없다면 무방비 상태에서 헝클어진 모습으로 인생을 끝내야 할 운명이라면........

 

      ♡

나   ↔  타인

      관계의 에너지 (집중해야 할 이유)

 

왜 우리는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려 하는가.(불가피성)

우리가 생각하고 살아가는 그리고 다른 사람들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연관시키는 방식들에 대해 의문을 품자.

 

과학의 확실성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은 어떻게 형성 되었는가

 

『사회적으로 구성된것의 존재와 가치는 논의의 대상이 될수 있으며 이것은 급진적으로 변환 될 수 있거나 아니면 최소한 교정될 수 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의 정체가 정치적인 문제이다.』

 

생물학적 존재 --------> 사회적인 존재

                  진단기술

 

예컨대 어떤 사람이 진단기술로 인해 비정상으로 판정, 분류된다면, 이러한 분류는 불가피 하게도 그들의 행동양식, 생활양식과 스스로에대해 생각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참고 문헌


      
 
 
 
 
 
 
 


모두 다 추천도서들이다. (특히나 알랭드 보통의 불안은 읽기 부담스럽지도 않고 재미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