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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철학은 음악이나 문학 등과 함께 독일인이 세계문화에 기여한 것 중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일반적으로 독일인은 너무 이론적이라는 평이 있으나 사색하는 것과 철학하는 것은 독일인에게 오랜 역사적 전통을 근거로 한 국민성의 중요한 구성요소가 되었다. 독일 철학의 역사는 바로 독일인이 그때 처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생활태도를 깊이 반성하고, 또 인간을 에워싼 갖가지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을 줄곧 찾아온 노력의 발자취이다. 그것은 또 그와 반대로 그 사람이 놓인 역사적 상황을 가장 깊은 차원에서 파악하고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사색의 철저성과 또 이 철저성을 갖추어야 했던 상황의 특수성이 독일철학을 유럽뿐 아니라 다른 지역의 철학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개성과 중요성을 띤 것으로 만들었다<네이버 백과사전>

 유럽의 발전, 더나아가선 세계의 발전은 유럽의 철학이 없었다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들의 발전된 세계의 원동력이었던 수학이나 과학 또한 철학에서 나온 것이지 않은가. 그들의 역사는 언제나 철학과 함께 살아 숨 쉬었고 그들의 사고를 지배했다. 때문에 그들을 깊게 이해하기 위해선 그들의 철학을 이해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독일은 전쟁으로 인한 황폐화를 경험하고 북방의 험한 풍토에서 살아와서 그런지 그들의 철학은 깊고도 철저한 느낌이다. 또한 사색적인 느낌이 아주 강하게 느껴진다. 다른 유럽의 나라와는 다른 특색이다.

 칸트 - 근대 철학의 재건


칸트는 독일 철학을 세계 철학의 정상에 올려 놓은 관념론의 대표적 인물이다. 칸트는 이성주의 철학을 했다. 즉 이성이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타고난 능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한마디로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고 질문한다.
<순수이성 비판>이라는 책은 "인간은 무엇을 알 수 있는가"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는 인간의 행동, 도덕 등의 문제인데 이것을 다루고 있는것은 <실천이성 비판>이다. <판단력 비판>은 "인간이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를 다루고 있다.
 이처럼 칸트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세 가지 활동에 대한 질문을 던짐으로서 주체로서 인간과 진리를 확고하게 구축하려 했었던 것 같다. 


 이전의 철학들이 주체에 대한 물음들로 가득했기 때문에 칸트는 주체가 출발점이 될 자격이 있는지 검증해야 했다. 
 흄은 귀납론을 부정했다. 우리가 흔히 쉽게 드는 예는 "이제까지 본 모든 까마귀가 다 까맸다. 따라서 모든 까마귀는 까맣다" 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말이 보장될수 없다는 것을 안다. 이것은 경험적 지식은 어떤 확실한 지식을 줄 수 없다는 말이다. 칸트는 이것을 받아들였고 또한 사물 자체를 인식하는 게 불가능 하다고 말했다. 근데 진리를 사물 자체와 일치하는 지식이라고 한다면 진리는 불가능 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때문에 칸트는 '진리'를 다른 식으로 정의하려 한다. 어차피 알 수 없는게 사물 자체라면 아무리 날고 뗘도 사물에 대한 지식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본래는 어떤지 모르지만 우리가 보는 모습과 '본래'가 일치하느냐를 두고 고민하지 말고 사물을 보는 모습을 판단하게 하는 방식을 연구하자고 제안한다. 이는 정말 놀라운 발상이 아니지 않을 수 없다. 중세 때 신의 존재를 떨치기 힘들었던 것 만큼 근대의 주체와 진리의 개념을 재건하려는 이 시도는 정말 혁신적이라 생각된다. 이는 대상이 인식을 만드는게 아니라 인식이 대상을 만든다는 생각이다. 이 처럼 우리 인간의 판단 형식을 찾으려는 시도는 이전의 생각과는 크게 다르다. 
 칸트 철학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선험적 종합판단'이란 말이 있다. 선험적은 경험적이란 말과 대칭된다. 

 우리의 인식 능력의 구조는 우리에게 선소여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적 지각을 통해서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경험 대상의 속성 속에 이러한 구조를 반영함으로써만 잡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경험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러나.....(생략).....우리가 어떤 것이 일반적으로 타당하다거나 지금까지 있어 왔던 그대로 있어야 한다는 말을 정당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우리의 인식이 경험으로부터 유래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한편 보편적이고 필연적으로 참이지만 실제나 실재의 구조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는 인식들이 있다. .......(생략)......보편성과 필연성이라는 특징만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못하다. "모든 인간은 결혼했더나 결혼하지 않았다", "모든 삼격형은 세 각을 가지고 있다", "검은 말은 흰 말일 수 없다" 와 같은 명제들은 보편 타당하고 필연적으로 참인 명제이다. ......(생략)......이것은 우리가 실재를 기술하는데 있어서 언어적 표현을 적용하는 방식이나 방법에는 일종의 척도가 되는 것이다.<근대독일철학, 요세프 슈페크>

 후험적(경험적)은 인간이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이다. 반면 선험적인것은 인간이 경험하지 않아도 아는 것이다. 보통 종합판단이라 하면 후천적이다. 어떤 사물이나 대상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면 경험이 있어야 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칸트는 물은 것이다. "선험적 종합판단은 가능한가?". 위 문단에 있는 "삼각형은 세 각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은 선험적이긴 하지만 동어반복이다. 주어에 이미 세 각을 갖고 있다는 의미를 포함한 것이다.(이는 새로울게 없다) 하지만 "모든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이다" 것은 주어에 내각이 180도 라는 분석을 할 수가 없다. 즉 이 명제는 주어에 없는 삼각형의 성질에 대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것이 선험적 종합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이야기지만 재미있어서 적어보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것도 동어 반복인 단순한 언어식 장난이라고 해석할수 있다.)
 이와 같은 선험적 종합 판단을 인간이 진리에 도달하게 해주는 판단형식이라 칸트는 생각한 것이다.

칼 맑스 (Karl Heinrich Marx)
 사실 맑스와 프로이트는 철학자로 유명하다기 보다 경제학자와 심리학자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은(방법론적인) 이전과는 틀린 혁신적인 생각들이었기 때문에 철학자라 불려도 될 것이다.(물론 그들은 철학적인 저서들도 있다.) 맑스에 대한 평가는 상반되는게 많지만 한번쯤은 그의 저서나 그에 관한 책을 읽는 것이 좋다고 생각된다. 
 맑스는 여러 철학자와 마찬가지로 인간을 정의 했다. 그는 인간의 특성에 대해 정의 내리려 하지 않았고 사회적인 특징을 찾으려 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고 말했다. 이는 사회적 관게에서 동 떨어져 인간을 정의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하고 하찮은 나의 생각인데 예전에는 대학친구들과 고등학교친구들 혹은 직장생활에서와 친구들 사이에서의 나의 모습들이 틀린것을  '자아 죽이기', '자기희생' 쪽으로 생각 했었을때도 있었지만 확실히 사회적 관계의 총체쪽으로 보는것이 설득력이 높은것 같다.좀더 작은 관점에서 보자면 자아는 내가 결정하는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관계(환경)가 결정하는 것이라는 건데..... 인간이란 어쩔수 없는 사회적인 동물인가보다. 흠.....그래도 내가 집착하는 몇안되는 개념 중 '자기희생' 이라는 것도 떨칠수는 없긴 하다.)

이런 생각들 또한 근대철학에서 끊임 없이 사고 했던 '주체'에 대한 생각들을 뒤집는 생각이라 볼 수 있다. 이런 혁신적인 사고가 그를 위인으로 만든 것이라 생각된다. 이런 생각은 주체철학과의 결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사고로 그는 역사 개념 또한 변화시킨다. 역사 역시 사회적 관계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다. <자본>과 같은 저작은 자본축적의 역사적 경향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프로이트 - 정식분석학과 철학




 많은 사람이 알다시피 프로이트는 철학자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철학에 대해 엄청난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철학 뿐 아니라 수없이 많은 분야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무의식'이란 아주 유명한 개념 때문이다. 이 개념은 철학에 아주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물론 '무의식'이란 개념외에도 정신분석학이란 독자적인 학문을 만들어낸 체계적인 개념들과 강력한 이론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는 의사였다. 최면을 행하던 중 그는 정신안에 있지만 의식되지 않는 영역인 '무의식'이란 것을 생각하게 된다. 또한 무의식을 발견함에 그치지 않고 보편적인 것으로 생각해 연구를 한다. 그리하여 <꿈의 해석> 이란 대작을 책을 집필한다. 
 그는 무의식이 특히 성욕과 관련있다 생각하였고 도덕적으로 용납하기 힘든 욕망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억압되고 감추어 진다고 했다. 유명한 예가 바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이다. 한마디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섹스하고 싶다는 끔찍한, 통제받을 만한 욕망이다.
 무의식의 발견은 정신분석학 최대의 업적이고 정신분석학이 존재하는 근거이다. 이런 무의식은 근대적 철학의 기초를(주체철학)을 해체한다. 하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어떻게 논리적으로 표현하기는 힘들다. 두루뭉수리하게 이야기 하자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에서 생각하는 '의식의 나'와 '무의식의 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는 '나' 이외의 다른 '나'가 인간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저서들은 참신하기도 하지만 다양한 임상적 사례와 문헌적인 분석들이 많기 때문에 재미가 있다. 하지만 성(性)이 많이 개입된 그의 이론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그의 이론은 이해하냐 못하냐 보다 받아 들이느냐 못받아 들이느냐에 관한 문제가 더 클 것이라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된다. 

비트겐슈타인 - 언어 게임


 
 비트겐 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는 내가 읽은 책 중에 가장 어려운 힘든 책 중에 하나였다. 책의 형식 또한 누굴 이해시키려고 쓴 설명 형태가 아닌 번호를 매긴 문장의 나열이었다. 작가 또한 스스로 비슷한 사고들을 해본 사람만이 이해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논리-철학 논고는 철학적 문제들이 언어 논리에 대한 오해에 기인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유명한 명제들인 다음의 말로 요약 될 수 있을 것이다 :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해질 수 있다. 그리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들은 침묵해야 한다. 

1. 세계는 일어나는 모든 것이다.
2. 일어나는 것, 즉 사실은 사태들의 존립이다.
3. 사실들의 논리적 그림이 사고이다.
4. 사고는 뜻이 있는 명제이다.
5. 명제는 요소 명제들의 진리 함수이다. (요소 명제는 자기 자신의 진리 함수이다.)
6. 진리 함수의 일반적 형식은 [ P,E,N(E)] 이다
   이것이 명제의 일반적 형식이다.
7. 말할 수 없는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논리-철학 논고에서 그림이론이라 불리는 그의 이론은 명제들은 요소 명제로 나뉘고 이 요소명제는 참인지 거짓인지를 검증할 수 있다고 한다. 명제의 진실과 거짓은 요소명제들의 진리함수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수학에서 배웠던 진리표를 이용해 명제의 진실, 거짓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개별적 명제들과 연결사를 통한 진리여부에 관한것은 그전에도 있었지만 비트겐슈타인은 다른 견해를 보인 듯 하다. (명제 자체에서 해석 하려하는)

5.132 p가 q로부터 따라 나온다면, 나는 q에서 p를 추론할 수 있다 ; p를 q에서 연역할 수 있다. 
 그 연역의 방식은 오로지 그 두 명제로부터 끌어낼수 있다.
 그것들 자체만이 그 추론을 정당화할 수 있다.
 추론들을 정당화한다고 하는-프레게와 러셀에서와 같은-"추론 법칙들"은 뜻이 없으며, 쓸데없을 것이다. 

 하나의 원자적 명제로부터는 아무것도 연역될 수 없다는 사실은 예컨대 인과성에 대해 흥미롭게 적용된다.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에서는 인과관계와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에서는 인과 관계와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는 "우리는 미래의 사건들을 현재의 사건들로부터 추론할 수 없다. 인과관계에 대한 믿음은 미신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내일 태양이 떠오르리라는 것은 하나의 가설이다. 우리는 사실 그것이 떠오를지 여부를 알고 있지 못하다. <러셀의 논리-철학 논고 서론 중>

 후기에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을 비판하며 다른 입장을 펼친다. 수학적 혹은 과학적인것과는 좀 더 떨어진 새로운 철학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그는 언어의 규칙을 모르더라도 실천을 통해서 얼마든지 배우고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단어의 사용은 행위 위에서, 단어의 사용은 "삶의 형식"에서 소급되는 것이다.
 후기의 그의 언어게임이란 이론은 언어와 실천의 결합이라고 볼 수 있다.

 나로서는 비트겐슈타인의 책은 너무 어려워 이해하기가 너무 힘들다. 이런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느낀점을 쓰자면 서로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는 그의 전기, 후기 저작들에 대해 이해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기에서 마무리 될 것이라 생각했던 그의 저작이 왜 <철학적 탐구>로 이어졌는가 왜 전기사상에서 한계를 느꼈는가를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 생각된다.
 
 17세기 전반에 일어난 30년전쟁으로 국토 전체가 크게 황폐된 독일은 근대화 물결에서 다른 유럽 여러 나라보다 낙후되었다. 이 사실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독일문화 전반의 모습을 규정하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한편으로는 중세 이래의 봉건적인 생활양식과 사회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민감하게 선진국인 영국과 프랑스의 새로운 문화에서 영향을 받는다는 ‘비동시적(非同時的)인 것의 공존’이라는 독일문화의 일반적 특징은 철학에서도 분명히 인정된다. 오히려 그와 같은 일반적 특징이 가장 전형적으로 나타난 부문이 바로 철학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비동시적인 것 사이를 상상력을 비약시켜 건너지르는 데 사상(思想)이라든가 철학 본연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 비동시적인 것 사이를 팽팽히 당기는 긴장의 강도가 자연히 독일 철학을 일반적으로 특징짓는 관념적 ·이상주의적 ·사변적 ·낭만적 ·내면적이라는 일련의 성질을 낳은 원인이 되었다. <네이버 백과사전>

 그들의 사상이 관념적이고 이상주의적인 이유는 위와 같다고 백과 사전은 말하고 있다. 이런 환경은 독일인의 철학 뿐만 아니라 그들의 국민성까지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또 다시 한번 그들의 관념적이고 이상주의적인 철학은 다시 한번 그들의 사고와 국민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참고서적>

철학과 굴뚝청소부 - 10점
이진경 지음/그린비

논리 - 철학 논고 - 10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지음, 이영철 옮김/책세상

근대독일철학 - 8점
요세프 슈페크 엮음, 원승룡 옮김/서광사

(철학과 굴뚝 청소부는 쉽게 쓰여진 철학서 중 으뜸이라고 생각된다.) 

그 외 예전에 읽은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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